참배의 예, 충렬사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며 충렬사를 돌아보다.
충렬사의 본전까지 오르는데에는 세층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층 한층마다 사당과 기념비, 기념관이 잘 정돈된 느낌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본전이 가장 위층에 자리잡고 있는건 올라오면서 많은 잡념들을 털어버리고
머리를 깨끗이 하라는 뜻이 숨어있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촬영을 하는데 있어서 제재를 가하는 등의 불편함은 없었지만
최소한 기념촬영을 하는데 있어 익살스러운 촬영은 피해야 할 것으로 본다.
기념관내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께 문의드리니 전시물의 저작권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기념관 내의 전체적인 모습 한컷만 담아보았다.
(작은 글귀의 내용은 필요하신 분만 읽어보시면 될듯합니다. ^^)
충렬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7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충렬사는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현 충렬사는 1605년(선조38년)에 동래부사 윤훤에 의하여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장군을 모신 송공사가 세워졌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구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와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홍신공을 추배하고
임란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과 애향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28,381평의 경역에 본전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충렬사
해태상(?), 충렬사
아.... 이름을 까먹었습니다...-_-;;; 소나무의 한 종류!, 충렬사
참배, 충렬사
소줄당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과 그 학행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위해 1652년(효종3년)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이라는 당호는 한유의 이제송에 나오는 '소호일원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란 선열들의 충절은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소줄당, 충렬사
현판, 충렬사
참배, 충렬사
의열각, 충렬사
참배, 충렬사
기념관, 충렬사
대문, 충렬사
부자, 충렬사
할아버지와 손자, 충렬사
할매 뭐 보는데? , 충렬사
의중지, 충렬사
이거 잉어 맞죠??, 충렬사
휴식공간, 충렬사
지압길,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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