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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忠烈祠)', 호국선열의 뜻을 기리다

여행에서 담은 흔적/2010-2011 Secret

by 용작가 2011. 6. 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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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8일


집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충렬사, 가볍게 산책가는 기분으로 충렬사를 다녀왔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부산 지방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의 연속이였던것 같다.

출입문 근처에 있는 연못과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소 유쾌한 느낌이 강했는데,
충렬사 본전에 가까이 갈 수록 엄숙하고 경건함이 깊게 감돌았다.


입구의 충렬탑, 충렬사



충렬탑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 충렬사



입구, 충렬사



참배의 예, 충렬사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며 충렬사를 돌아보다.



충렬사의 본전까지 오르는데에는 세층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층 한층마다 사당과 기념비, 기념관이 잘 정돈된 느낌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본전이 가장 위층에 자리잡고 있는건 올라오면서 많은 잡념들을 털어버리고
머리를 깨끗이 하라는 뜻이 숨어있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촬영을 하는데 있어서 제재를 가하는 등의 불편함은 없었지만
최소한 기념촬영을 하는데 있어 익살스러운 촬영은 피해야 할 것으로 본다.
기념관내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께 문의드리니 전시물의 저작권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기념관 내의 전체적인 모습 한컷만 담아보았다.
(작은 글귀의 내용은 필요하신 분만 읽어보시면 될듯합니다. ^^)


충렬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7호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충렬사는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현 충렬사는 1605년(선조38년)에 동래부사 윤훤에 의하여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장군을 모신 송공사가 세워졌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구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와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홍신공을 추배하고
임란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과 애향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28,381평의 경역에 본전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충렬사



해태상(?), 충렬사



아.... 이름을 까먹었습니다...-_-;;; 소나무의 한 종류!, 충렬사



참배, 충렬사



충렬사


소줄당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과 그 학행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위해 1652년(효종3년)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이라는 당호는 한유의 이제송에 나오는 '소호일원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란 선열들의 충절은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소줄당, 충렬사



소줄당, 충렬사


본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지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부산 지역에서 전사한 선열 22명과 동래부, 부산진, 다대진 및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위패 4위, 의병 62명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의 본당이다.


현판, 충렬사



참배, 충렬사



본전, 충렬사


의열각


동래성에서 기왓장으로 왜적과 싸웠던 두 의녀와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 애향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의열각, 충렬사



참배, 충렬사



향, 충렬사


기념관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보여주는 6폭의 기록화와 천곡수필 등 고서, 갑옷, 치제문 등의 유품 102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충렬사



기념관 내부, 충렬사


정화기념비


충렬사 정화사업을 기념하여 제작한 비로 호국선열릐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화기념비, 충렬사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


임진왜란 당시 동래지방 출신으로 창의모병하여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선무원종공신녹권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연전토적에 전공이 혁혁한 24별전공신의 공적비로 1988년 5월 14일 제막하였다.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 충렬사



충렬사 그 밖의 풍경



충렬사는 호국선열의 정신과 넋을 기리고, 애도의 마음을 갖는 경건한 장소이긴 하지만,
시민들의 자유로운 휴식공간, 공원같은 곳이기도 했다.
잘 정돈된 정원과 휴게시설, 산책로가 준비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모습이였다.

개인적으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충렬사의 그 뜻을 올바르게 인식한다면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충렬사를 돌면서 특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왔던 꼬마의 모습이 인상적이였는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시끄럽게 굴지도, 까불지도 않는 의젓한 모습이 참 대견스러웠다.



대문, 충렬사



부자, 충렬사



할아버지와 손자, 충렬사



할매 뭐 보는데? , 충렬사



의중지, 충렬사



이거 잉어 맞죠??, 충렬사



휴식공간, 충렬사



지압길, 충렬사



산책로, 충렬사



태극기, 충렬사



 행복한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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